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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서 숭고로 : 20세기 예술 패러다임의 결정적 변화

 

 

글쓴이 김동훈 교수 / 한국예술종합학교

 

 

우리가 매일 입에 올리는 아름다움과는 달리 "숭고(崧高)"는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숭고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부정적인 답변이 되돌아온다. 일반대학 학생들은 물론이고 예술대학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숭고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다는 학생들에게 언제 들어봤느냐 물으면 대부분은 현충일이나 광복절이라고 대답한다.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학생들이 가장 많이 들어 본 표현이다. 이때 숭고는 어떤 뜻을 지니는 걸까? 학생들이 제시하는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보통 사람은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모든 사람의 우러름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고상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숭고(崇高)를 풀이하면 높이 우러러 받든다는 뜻이니 학생들의 생각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예술영역에서 숭고(崇高)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다시 물으면 예술 전공 학생들조차 손을  들지 않는다. 예술전공이 아닌 학생들은 거의 들지 않는다. 보통의 예술작품에 대해 "숭고"라는 말을 잘 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말에는 숭고 대신 장엄하다든가 웅장하다든가 하는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자연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와는 달리 서구 언어에서는 숭고를 가리키는 Sublime(영어, 불어), Erhaben(독일어) 등의 단어들이 자연사물이나 예술 작품에 사용된다. 이 경우 서양 언어에서도 장엄하다거나 웅장하다는 뜻을 지닌 ( grand | grandios, magnificent | magnifique) 표현을 하지만 숭고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서는 엄청나게 큰 폭포를 보면서 웅장하다고 말하고, 대자연의 장엄함을 느낀다는 표현하지만, 숭고라 말하지는 않는다. 반면 서양에서는 일상적인 표현으로는 웅장하다거나 장엄하다와 숭고하다는 말을 거의 구별 없이 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세계적인 예술가들, 특히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해석할 때 숭고(崇高)라는 단어가 우리말과 글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캔버스를 색 면으로 가득 채운 로스코나 뉴먼, 말레비치 등의 작품의 특징을 사람들은 한 마디로 숭고라고 요약한다. 그 외에도 숭고하다고 말해지는 작품들을 계속 살펴가다 보면 충격적이라거나 끔찍하다거나, 잔혹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묘사한 뒤틀려 있는, 고깃덩어리처럼 보이는 인간 신체에도 사람들은 숭고라는 레이블을 붙여준다. 이렇게 된 데는 20세기 이후 발생한 서양예술의 전반적인 흐름의 변화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서양에서도 끔찍함이나 잔인함을 숭고하다고 평가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바로 그런 특성들이 숭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숭고는 수많은 현대예술작품들을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는 1984년 발표한 논문 숭고한 봉헌서두에서 숭고가 유행 중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유행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유행은 아마도 운명이 매우 비밀스럽게 혹은 신중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일 것이며, 지금 유행하고 있는 숭고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예술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이제 끊임없이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서도 무언가 묘한 감동을 주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 앞에 서 있다.

   

뭉크의 절규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모습.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려낸 푸줏간에 걸린 듯이 보이는 인간의 머리. 말레비치의 소위 예술의 자살행위를 통해 드러난 온통 검은 색으로 칠해진 캔버스. 이런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회자되기 시작한 숭고는 이제 낭시의 말처럼 거의 유행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숭고는 미학이 자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도전장의 내용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건 이제 됐어. 숭고가 필요해!” 수천 년 서구 미학사를 통해 줄곧 미학논의의 중심에 서 있었던 아름다움은 더 이상 미학의 주된 관심대상이 아니다. 현대의 미학논의를 살펴보면 아름다움을 집중적으로 고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났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결코 어떤 한 철학자의 사상이나 한 예술가의 작품으로부터 간단하게 찾아질 수 없다. 아름다움을 넘어 새롭게 유행하고 있는 숭고의 의미가 무엇인가 자세히 고찰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예술로 분류되는 영역 중 일부는 이전에는 자유인의 교양을 위해 필요한 기술(ars liberalis)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수학적 원리에 기반을 둔 조화로운 소리를 중시하면서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음악이나 문학의 일부로서의 수사학이 이에 속한다 회화, 조각, 건축 등은 육체적인 노동과 숙련이 필요해서 노예들이나 연마할 기술로 여겼다. 18세기 들어 몇몇 학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분야를 하나의 체계 안에 묶으려 했던 것은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그 특징을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에서 찾았다.

 

예술을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이라 정의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에게 그런 착상이 떠올라서가 아니었다. 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18세기 사상가들처럼 문학, 시각예술, 음악, 무용, 연극 등을 하나로 묶어 예술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들의 저서들 여기저기서 오늘날 이 영역들에 공통되는 특성으로 모방과 아름다움을 제시하는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다그 후 많은 이들이 그 영역들 모두가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을 추구한다는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품고 있었다. 18세기 사상가들은 거기에 적합한 용어를 고안해 내서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막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용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술가들은 어째서 아름다움보다는 숭고를 추구하게 된 것일까?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칸트가 아름다움을 즐거움이나 감동을 제공하는 다른 특성들과 명확하게 구분하여 정의하게 되자 예술에 관한 사유에도 엄청난 변화가 나타났다. 칸트의 말처럼 아름다움이 본능적 욕구의 충족이나 도덕적 가치 판단에서 오는 즐거움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예술은 종교나 도덕적 가치판단과 관련된 활동과는 다르다. 또 본능적 욕구를 직접, 간접적으로 해결하는 활동과 관련된 일상적 삶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이다. 다른 한편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각능력은 본능적 욕구의 충족과 관련이 있고 오성 혹은 이성은 진리의 추구, 도덕적 가치판단과 관련이 있다. 이 둘은 그 성격이 서로 완전히 달라서 하나로 통합될 수가 없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의 인격을 가지므로 하나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하려면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과 대립이 해소되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 또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라고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프리드리히 쉴러가 주장했다. 아름다움은 다른 두 영역과는 독립적인 영역이면서 동시에 그 영역들을 매개하고 통일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키워내고 이를 통해 이상적 사회를 실현하려면 인간을 아름다움/예술을 통해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가 주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아름다움의 도움으로 감각적인 것을 이성아래 복종시켜 이성적 인간이 되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쉴러는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 이후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전자의 답을 선택했다. 아름다움이 최고의 목적이며 진리에 도달하는 최고의 방법이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낭만주의를 거쳐 19세기에 순수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 유미주의에 이르러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렇듯 아름다움을 극단까지 추구한 유미주의에 이르러 오히려 아름다움이 해체되기 시작한다. 유미주의의 대표적 예술가로 꼽히는 에드가 앨런 포나 샤를 보들레르 등의 작품 속에서는 아름다움보다는 끔찍함이나 잔인함, 심지어는 추함이 열정적으로 추구되고 형상화되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보이는 길을 가게 된 것일까? 전적으로 아름다움만을 나타내기 위해 도덕적인 선함이나 종교적인 진리를 아름다움에서 분리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끔찍하고 잔인하거나 섬뜩한 것들, 심지어는 추해 보이는 것들까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름다움을 극단까지 추구하자 오히려 아름다움이 해체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19세기말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이 형상화하려고 추구하는 목표가 아름다움이 아니라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숭고로 이행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아마도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오늘날 숭고하다고 평가받는 작품들은 웅장하거나 장엄하지도 않고 도덕적으로 고상하여 우러름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끔찍하거나 잔인하고 심지어는 추하기까지 한 작품들을 숭고하다고 부르게 한 의미의 변화는 도대체 왜,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오늘날 유행이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는 숭고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