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기제조원: Canon카메라모델: Canon EOS RP플래시: Flash did not fire초점거리: 24.0 mm조리개변경: 56000/10000노출방식: Manual control노출모드: Manual exposure노출시간: 1/40 sec노출보정: 0W/B: Auto white balanceISO: 200촬영일자: 2024:10:05 17:34:04
대구 달성군 옥포면 송해공원에 위치
송해 선생을 좀더 알기위해 자료를 찾아보고 공유 해 봅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초기에는 고향(재령)에 머물렀는데, 이 당시 구월산 일대에 활동하던 공산당 유격대의 모병, 대한민국 국군의 북진 후에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2~3천여명 규모의 패잔병의 약탈을 피하려고 인근 마을에 숨었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1950년 12월 북한군과 중공군이 남하하던 때 다시 나가려는데, 당시 어머니에게 "얘야, 이번엔 조심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걱정 마세요."라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고 나왔는데, 그것이 생전의 마지막 인사였다.
조선일보의 6.25 관련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저 대화를 하고 어머니가 준 가래떡이 마지막으로 집에서 먹은 밥이라고 한다. 또한 북한군과 중공군의 진주와 포격을 피해 재령에서 남쪽 항구인 해주 항으로 피난을 갔다 보름 정도 걸린 이 길에서 북한군의 포격과 기관총 세례를 피하다 철교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다고 한다.
북한 땅이 되어 버린 해주에서 건너편의 섬 연평도로 은밀히 나룻배를 타고 도착한 뒤, 연평도에서 미군 LST선에 타면서 부산까지 내려왔다. 이때 실향민으로 배 위에서 “바다야 내 갈 길 어디냐”는 생각에 지금의 이름, 즉, 바다 해(海) 자를 예명이자 아호로 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훗날 주민등록 체계가 확립되고 나서 그의 본명이 된다.피난선을 타고 도착한 부산항에서 그는 앞 사람만 따라다니다 군에 입대해 통신병으로 복무하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 메시지를 직접 타전하였다.
그때 당시 쓰던 모스 부호를 말년에도 또렷이 기억해내었다. 그리고 당시 군대 선임이 혼자인 그에게 여동생을 소개해 줬는데, 그녀가 바로 그의 부인 달성군 옥포에 사는 석옥이다.
데뷔 이전의 내용이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송해 역시 6.25 전쟁 참전용사라 국가유공자이며, 그의 사후 장례식장에 국가유공자증이 영정과 함께 진열되면서 대중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